정직한 뉴스! 정확한 정보! 도시재생신문

유리면류관: 어떤 면류관; 2010.09.24 10:35 입력 | 2012.01.30 02:20 수정

은방희 소설가 mustcan@naver.com

<IMG style="MARGIN: 4px 8px 4px 0px" src="/PEG/12852921376903.jpg" align=left>교회의 종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지도 한참이나 되는데, 도시의 새벽은 그 으슴프레한 베일을 선뜻 걷어치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여름밤 먼 하늘가로 흐르는 뇌성같은 잔잔한 웅얼거림이 점점 커지더니 “붕”하고 서울로 들어닥치는 첫차가 기적을 울린다.
몸을 웅크리고 뒤틀며 야밤을 지샌 완행열차 손님들의 북적거리는 기운으로 서울역 시계탑이 다섯 번 울리면 도시의 아침이 서서히 기지개를 켤 것이다.
새벽은 항상 내게 무엇인가를 재촉하며 늘펀히 게으름을 피우게 버려두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일깨워지는 부활절이라는 유명한 새벽은 특별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가건 철이 바뀌건 생판 상관없이 무심한 나도 이 절기에는 또 하나의 봄이 지나가는구나 하고 창 밖을 내다보는데, 어젯밤 짙은 커피로 인하여 잠을 설치다보니 내 인생이 반을 딱 접은 것 같은 나이에 이르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초년 고생 사서 한다는 말은 고달픈 젊은이들을 안쓰럽게 여긴 노인들의 덕담일 뿐이고, 부모 복 타고난 사람이 남편복 있고 남편 복 있는 사람이 자식 복 있다는 말이 훨씬 보편적으로 진리인 것 같다. 
사람들은 좀 괜잖은 과거가 현재의 초라함을 무마해 준다는 듯이 걸핏하면 과거사를 들쳐 세운다. 
술집 호스테스 치고 양갓집 규수 아닌 사람 없고, 무능한 백수들 치고 조상 자랑 안하는 자 없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어떠한 존재인가.
‘50년대 무엇 했지 하면 쭈뼛쭈뼛해지고’ 60년대 어디 있을 거지? 하면 슬그머니 외면해 버리고 싶다.
그 정도로 떳떳지 못한 이력을 덮어둔 채 나는 실로 늠름하게 교회와 학교 그리고 아파트의 삼각로를 거의 규칙적으로 내왕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과년해 버린 것이다.
차 주사네 소실 평양댁이 나라는 중뿔난 존재 하나를 큰마나님 앞에 넘겨주고 세상을 등진 지 삼심 여 년, 영락없이 친 딸로 둔갑한 나로서는 큰 어머니 심권사가 나의 근원이요 뿔 리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조차 없이 그녀에게 접붙여져 있었고 친자식들보다 공인된 자식 중의 자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간혹 출생이 불분명한 딸이라는 수근거림이 있다해도 그까짓 정통성 따위에 매달려 찔끔거릴 만큼 다소곳한 나도 아니다. 
“선생님 도 못 주무셨어요?”
노크를 하고 고개를 들이민 선이가 물었다. 나는 얼근 차렵이불자락을 제치고 일어나서, 대충 세수를 끝냈다.
단정하게 옷을 입은 선이에게는 신선한 내음이 피어났다.
나는 거울앞에 선 채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어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부터 딱 한숨 잤으면 좋으련만”
기다리고 서 있는 선이를 보며 내가 계면쩍게 웃었다.
“할머님 성황에...” 선이도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을 받으려는 선이에게 손짓을 해 말렸다.
그러나 어머니 심 권사는 내 시들한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야 말겠다는 듯 끈질기시다.
나도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들었다.
“권사님, 오밤중에 웬일이슈? 잠 좀 자게 그냥 놔두시지...”
나는 딴청을 부렸다.
“선생님께서는 송이가 칠한 달걀도 못 보셨단 말이지? 부활절 아침에 늑장이라니....”
“아, 그거요? 부활이요? 믿을 만하니나 해요?‘’‘내사마 권사님 치마폭에 매달려 풍덩하고 따라 뛰면 될텐데...”
“얘가 또 이무기짓 시작허네...서둘러”
“호호...” 나는 마음으로부터 웃었다.
공식석상에서 우리는 선생님과 권사님이라 부른다.
다소 곰살스럽게 들리겠지만 마음이 깊이 닿아 있는 이 유별난 모녀지간에는 어떤 소중하고 대견한 맘씨로 엮인 일종의 게임이다. 책상 위에는 어머님이 오실 때마다 한 번씩 가슴에 대어보는 낡은 성경책과 찬송가가 내 손이 닿기를 기다리듯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살아 있는 무엇인가를 만지듯이 약간 움츠러드는 마음을 책을 집어들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왔다. 
밖은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었다. 가로등이 흠뻑 울고난 여인의 눈망울처럼 아련하게 떠 있었닫.
“저기 택시가 온다”
나는 안경을 벗어 백속에 담았다.
“첫 손님일텐데 재수없다고 안 태워줄까봐”
“선이가 미소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