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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法 ‘백지동의서’ 무효 확정판결: 2010.02.09 15:12 입력 | 2010.02.10 15:36 수정

大法 ‘백지동의서’ 무효 확정판결
영향권 든 조합 사업 ‘올스톱’ 위기

 
대법원이 이른바 ‘백지동의서’를 받아 재개발 사업을 추진해 온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 관행에 확실한 제동을 걸었다.
‘백지동의서’란 건축물의 설계 개요와 개략적인 건축물 철거ㆍ신축비용은 기재하지 않은 채 조합원의 이름과 도장만 찍은 동의서를 말한다. 주로 조합설립인가를 위해 많이 쓰이는데, 조합원 동의율을 높이기 위해 불법으로 받는 일종의 ‘불완전’ 동의서다.
대법원 2부(주심 양창수)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6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조합의 설립인가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이 모 씨(63) 등 조합원 75명이 해운대구청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지난달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재개발 조합설립인가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은 인가 요건인 토지등소유자의 동의 여부를 심사할 때, 동의 내용에 법정 기재 사항이 모두 포함돼 있는 지와 날인된 도장과 인감증명 등이 일치하는 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이런 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동의서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사건 동의서에는 관계 법령인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시정비법)이 정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면서 “불완전한 동의서가 유효하다며 내린 조합설립인가 처분은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를 가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린 어떻게 되나?’ 업계 ‘공포’ 확산
조합설립무효 시 이후 사업절차 무효

 
이번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일선 조합들의 공포감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장에서 별도의 내용 없이 조합설립인가에 필요한 동의서상에 조합원의 이름과 도장만 찍어 관할 관청에 접수ㆍ인가를 받는 것이 관행처럼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판결은 이 같은 불법 위임장 형태의 동의서에 대해 사법부가 ‘철퇴’를 내린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달 초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현재 정비사업조합 설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나 조합이 설립돼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구역은 무려 614곳으로, 전국적으로는 1500곳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계자들은 이들 모두 직ㆍ간접적으로 이번 판결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법원에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의 절차상 하자를 이전보다 깐깐하게 따지는 경향이 확산돼 ‘법원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차에 이와 같은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힘이 실리는 판결인 만큼 아무래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우동6구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조합들이 일단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 해당 조합의 설립인가가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조합설립인가 이후 받았던 사업시행인가와 관리처분인가 등의 후속 절차가 모두 효력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일선 조합들은 이번 판결이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재개발을 이끌고 있는 한 조합장은 “판결이 나오자마자 법률 자문을 하고 관련 서류들을 재검토하고 있다”면서 “지금 당장 소송이 제기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조합설립인가가 취소될 경우 사업 지연이 불가피하다. 그나마 조합설립인가 직후인 사업장의 경우 사정이 나은 편이다. 사업시행인가를 받았거나 동ㆍ호수 등을 지정하고 추가 부담금 등을 결정하는 관리처분인가가 난 사업장의 경우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통상 관리처분인가를 받으면 이주ㆍ철거 작업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시공사는 조합을 대신해 이주비 등을 지급한다. 이주비는 사업장 규모나 위치 등에 따라 가구당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에 달한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시공사의 지위 유지 문제다. 관계 법령인 도시정비법에서 시공사를 조합설립인가 이후에 선정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앞서 언급한 이주비 처리 문제가 자연스럽게 불거지게 된다.
상황에 따라 시공사가 바뀔 경우 이주비 반환 청구 등의 ‘줄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 설령 원래 시공사가 재선정돼 시공권을 유지하더라도 지연된 사업 기간 동안 발생하는 이자비용 등에 대한 처리도 골칫거리다. 시공사와 조합, 인ㆍ허가권자인 행정 관청 등이 서로를 상대로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법률 전문가 김 모 씨는 “관련 소송에서 조합설립인가가 무효화될 경우, 기존 조합에서 행해진 사업 행위가 모두 무효가 될 공산이 큰 만큼 소송이 진행 중인 경우 사업 추진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시공사의 지위에 대해선 도시정비법이 ‘시공사는 조합설립인가 이후 선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만큼 현행법과 법원 판결 간 ‘괴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파급효과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이에 대한 업계 전반의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국 100여 조합 소송中…시장 ‘패닉’ 조짐

 
현재까지 유사한 소송에 휘말린 전국의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장이 1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집계됨에 따라 이번 판결로 인한 시장의 혼란은 점점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의미를 갖는 것은 ‘확정판결’이란 점이다. 지난해까지 불완전 동의서를 근거로 설립된 조합은 무효라는 1ㆍ2심 판결이 있었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초 작년 하반기에 확정판결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대법원이 “조합의 설립 무효에 관한 소송은 민사가 아니라 ‘행정’으로 다투라”고 결정하면서 확정판결이 늦어졌다.
이번 판결의 파장이 클 것으로 우려되는 것은 현 단계에서 조합 설립의 하자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은 중도에 다시 동의서를 받는 방식으로 하자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소송은 하자 치유 자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실제 불완전 동의서를 이유로 최근 조합설립 무효판결을 받은 왕십리뉴타운1구역(서울시 성동구)에 대해 재판부는 조합설립인가의 후속 절차인 사업시행인가 및 관리처분인가 등도 모두 무효화시켰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얘기다.
한가람법률사무소의 전영상 대표변호사는 “우동6구역과 같은 사례는 처음부터 다시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 같다”면서 “애당초 부실 동의서를 근거로 인가를 내준 관할 구청의 잘못인 만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사업을 재개해야 하는 시점에 대해 ‘원점부터 해야 한다’와 ‘조합설립인가 전부터 하면 된다’는 논쟁에 대해서는 “추진위가 부활할 수 없다는 행정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원점에서부터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인가권자의 잘못도 있기 때문에 추진위가 소멸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경우엔 조합설립인가 전 단계부터 사업을 재개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합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 소송이 모두 이번 대법원 판결의 영향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의서 하자로 인한 조합설립 무효소송의 유형은 ▲필요한 기재 사항을 빠뜨린 백지동의서를 받은 경우 ▲국토해양부(이하 국토부) 지침에 의한 표준 동의서를 사용한 경우 ▲국토부 표준 동의서에 분담금 계산 공식까지 제시한 경우 등 3가지로 나뉜다.
백지동의서 이외의 경우는 아직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1ㆍ2심 판결도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표준 동의서 양식을 사용한 경우 “비용 분담에 관한 사항이 구체적이지 않다”며 무효로 보는 판결이 많고, 계산 공식까지 붙인 경우엔 조합 설립이 유효한 것으로 보는 판단이 많다. 대법원은 이르면 상반기 중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확정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천지인합동법률사무소의 남기송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조합원들이 재개발ㆍ재건축에 참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땐 올바른 방향으로 내려졌다”고 평가하면서도 “다만 하급심에 판결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동의서상의 하자를 둘러싼 논란은 대법원 판단이 모두 나와야 마무리될 수 있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국토부ㆍ서울시, 570여 곳 실태 파악
전수조사 결과 기초 대응책 마련

 
일선 조합들의 우려가 급속히 확산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주무부처인 국토부와 서울시가 일제히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국토부는 ‘백지동의서’와 같은 불완전 동의서를 받아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하거나 인가를 받은 재개발ㆍ재건축 단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재개발ㆍ재건축 아파트 및 조합을 대상으로 ‘전수조사(全數調査)’에 착수했다고 지난 1일 밝혔다. 서울시도 시내 전 조합 및 추진위를 상대로 불완전 동의서를 받은 사례를 수집하고 법률 자문을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이번 조사에서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와 재개발ㆍ재건축 조합을 대상으로 ▲불완전 동의서 문제로 소송이 진행 중인 사업장 ▲백지동의서를 받아 설립인가를 받은 조합 ▲지자체의 행정 감독 소홀 여부 등을 파악할 예정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현재 정비사업이 추진 중인 단지는 전국적으로 재개발 736곳, 재건축 534곳 등 모두 1270곳으로 조합설립인가 이후의 절차를 진행 중인 570여 곳이 중점 조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임태모 국토부 주택정비과장은 “현재 유사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얼마나 되는지, 설령 소송이 제기되지 않았더라도 백지동의서를 사용한 곳이 얼마나 되는지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면서 “앞으로 한 달가량 실태 조사를 벌인 뒤 결과에 따라 대응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권창주 서울시 주거정비과장도 “불완전한 동의서를 근거로 사업이 상당히 진행된 구역의 경우, 이를 보완해 제대로 된 동의서를 받아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할 것”이라면서 “대법원의 확정판결인 만큼 시(市) 차원의 대안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일선 조합들이 하루라도 빨리 보완 작업을 하는 것이 조합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의 반대파 ‘비대위 연대’ 출범 움직임
조합ㆍ업계, ‘줄소송’ 후 사업차질 우려

 
이번 대법원 확정판결은 최근 법원이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추진위 및 조합의 설립인가를 무효화시키는 판결을 잇달아 내리는 와중에 내려져 상징성이 크다. 무엇보다 법원이 ‘정비구역지정 전(前) 설립된 추진위는 무효’라고 한 판결의 후속타 성격이 강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광명마을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 구역 내 일부 주민들이 “정비구역지정 전에 설립된 추진위는 무효”라며 원주시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주민 동의(과반수)가 필요한 추진위를 구성하려면 토지등소유자의 범위가 먼저 확정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의 정비구역 지정ㆍ고시가 선행돼야 함이 명백하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09년 10월 29일 선고 2009두12297판결)
서울행정법원도 같은 해 12월, 서울시 중구 신당8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장 내 일부 주민이 “정비구역지정도 되지 않았는데 관할 구청이 추진위 승인부터 한 것은 위법”이라며 중구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09년 12월 11일 선고 2009구합13375판결)
법원 이밖에 ▲조합원별 종전 자산 평가 금액이나 향후 분담금 등을 알려주지 않은 관리처분 ▲노후ㆍ불량 주택 기준을 채우지 못한 곳에 대한 정비구역지정 등도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 같은 판결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시장의 혼란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재개발ㆍ재건축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소송 대열에 가세하고 있는 데다 일부에서는 전국적인 연대 조직의 결성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오는 3월 1일 ‘전국 뉴타운ㆍ재개발 비상대책위원회 연합(이하 전비연)’을 결성, 조직적인 대응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비연 관계자는 “지난 2007년부터 2008년 사이에 서울시로부터 관리처분인가를 받은 47개 재개발 사업 구역에서 모두 불완전 동의서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이를 중심으로 소송을 제기해 잘못된 사업을 바로잡고 조합원들의 권익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신당8구역 판결 직후인 작년 12월 22일 이후 약 40일 동안 23건의 유사 소송이 접수됐다. 법원 관계자는 “700개가 넘는 전국의 재개발 사업장 중 80% 이상이 정비구역지정 전에 추진위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판결이 보도된 후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앞 다퉈 소송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법원이 지적한 절차상의 요건을 제대로 갖춘 조합이나 추진위가 많지 않은 만큼 상당수 사업장이 ‘소송의 늪’에 빠져 사업이 상당 기간 지연되거나 최악의 경우 ‘취소’되는 사례도 나올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한편 이번 판결의 후유증을 앓는 사업장이 벌써부터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16구역, 마포구 아현4구역, 서대문구 가재울4구역, 성동구 금호19구역 등 일반분양 직전에 소송에서 패소한 곳에서는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1년 이상 사업이 지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말 조합설립인가 무효 판결을 받은 왕십리뉴타운1구역의 조합 관계자는 “이주비 등을 모두 대출에 의존하다 보니 매월 이자비용만 10억 원에 달한다”면서 “사업에 찬성하는 주민들의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정훈 기자 hjeong25.r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