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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폐가에서 소녀에게: 2010.03.23 18:22 입력 | 2010.03.23 20:14 수정

유리(琉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부모의 심정이 이토록 서글프기에 미혼인 기자의 마음도 울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되는 꿈에 부풀었던 한 소녀의 생명은 제가 한 행동도 ‘모르겠다’, ‘(변호사에게) 혹시 해리현상(解離現象ㆍ정신적 충격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처럼 말과 행동을 하고 나중에는 자기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 아느냐’ 운운하는 한 악마의 손에 무참히 스러졌다.
 
지난달 말 부산시 사상구 덕포동에서 이 모 양이 실종됐다. 소녀는 동종 범행으로 전과가 있던 김 모에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돼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것도 기자가 매주 돌아다니는 재개발 사업장에서.
 
실종됐던 소녀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을 무렵 기자는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장이 안전 ‘사각지대’라는 내용의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 후 약 2주간 10여 곳의 재개발ㆍ재건축 현장을 돌아다녔다.
 
소녀가 살던 덕포1지구 재개발 현장엔 가 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취재를 하러 현장에 나갈 때마다 그녀의 흔적이 맴돌 것 같다. 그날도 그랬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재개발 사업장 내의 폐가에 들어섰을 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소녀가 떠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평상시 쓰고 있던 안경도 없어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앞에선 야수 한 마리가 소녀를 유린했다. 그리고 끝내 목숨도 앗았다.
 
기자가 찾았던 현장 바로 인근에는 조합원들끼리 조합 지지자와 반대파로 양분돼 으르렁거리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껏 재개발ㆍ재건축 현장을 신명 나게 돌아다녔던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신명’이 ‘신물’로 바뀌고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지금까지 기자가 만난 재개발ㆍ재건축 조합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바쁜’ 사람들이었다. 돈이 얽혀 있는 문제를 다루느라 그런지 수십 번 구청을 찾아가 민원을 넣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종종걸음으로 법원에 가 소장을 접수한다. 이후에도 무슨 일만 터지면 뻔질나게 드나든다.
 
기자가 조합원이라면? 마찬가지일 듯하다. 그래서 씁쓸했고, 그래서 생각했다. 이제 그 수많은 발걸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범죄와 사고의 ‘현장’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집 근처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장으로 향해 보는 건 어떨까. 하루에 한두 걸음씩만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제2, 제3의 ‘소녀’가 등장할 것이다. 게다가 그 ‘소녀’는 나의 딸, 나의 동생, 나의 언니ㆍ누나로 변신한 채 산새처럼 날아갈지 모른다.
 
정훈 기자 hjeong25.rn@gmail.com